오래된 책을 보다 문득 넋두리

2019.10.11 12:30뜬금없는 끄적거림/뜬금없이 혼잣말

   우리 집 거실 한 쪽은 책장으로 꾸며져 있다. 길다란 책장에는 오래된 책들과 DVD들이 사이사이 먼지를 품은 채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 중에는 몇 번이나 읽었던 책도 있고, 읽다가 포기한 책도 있고, 읽기를 포기한 책도 있고...

 

   얼마 전, 채빈이가 이 책장을 한바탕 뒤집어 놓은 덕에 책장을 다시 정리해야 했다. 여기저기 던져놓은 책들을 정리하다 오래된, 아주 오래된 책 몇 권을 발견했다. 그 중에는 내 책도 있지만 써니가 가져다 놓은 카프카의 책도 있어서 나도 모르게 살며시 열어보았다. 한 장 한 장 넘겨지는 페이지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먼지(또는 곰팡이)가 일어났지만 요즘은 쉽게 볼 수 없는 세로읽기가 새삼 신기해서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카프카를 읽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지막히 들리는 사각거림. 손끝으로 전해지는 조금은 거친 듯한 부스럭거림. 누런 종이에 살며시 젖어 들어간 얼룩과 조금은 오래된 톱밥 냄새...

 

 

   생각해보면 어릴 적 나는 매일 책만 읽던 아이였다. 사실 책을 그렇게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고, 딱히 할 것이 없다는 이유, 친구들과 노는 것이 어색하다는 이유가 진짜였다. 한번은 어머니가 밖에서 놀고 오라며 회초리를 들었지만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책은 소설이나 만화보다는 백과사전이라든가 사회과학 계열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앨런 토플러의 3의 물결을 초 4 무렵에 읽었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5학년 때 읽었다. 다만, 내가 영특하거나 혹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다기 보다 그저 글자를 읽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저 글자를 읽고 있으면 하루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그것이라면 족하는 정도였고, 그러니 만화만 아니면 어떤 책이든 상관없었고, 글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저 좋은 책이라 생각했다.

 

   그런 내가 잠시 머물렀던 직장이 출판사였다. 처음 한 1년 동안은 딱히 정해진 업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일 저 일 주어지는대로 해야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다닌 직장 중 가장 맘에 드는 직장이기도 했다... 원하는 글자를 원하는만큼 읽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일이든 휴식이든 혹은 다른 이유이든... 그 때의 나는 종종 창고에 쌓인 책을 침대 삼아 밤새도록 글을 읽기도 했고, 그대로 잠이 들기도 했다. 팔리지 않는 오래된 책을 찾아 몰래 읽는 재미라든가 가장 먼저 신간을 접하는 행운도 있었다. 가끔 대학교에 책을 넣어야 할 때면 대학 도서관의 그 많은 책들을 몰래 홈쳐보기도 했다. (정작 뒤늦게 대학을 갔을 때는 도서관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아마, 그 무렵의 나는 여전히 책을 읽기 보다 글자를 읽었던 것 같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보다 조용히 혼자 있는 것이 좋았고, 사람들과 대화하기 보다 혼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을 좋아했으니 그저 누군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종이의 질감이 어떠한지 페이지의 소리가 어떠한지 억지로 찾아보지 않으면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지경이다. 얼마 전 구입한 3권의 책을 제외하면 지난 1년간 종이책을 구입해 본적 없다. (정기구독하고 있는 잡지는 열외로 하자) 이젠 무겁게 책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테블릿만 있으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이유로 e-북을 애용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책을 읽는 빈도가 무서우리만큼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물론 e-북을 이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도 이제 서서히 나이를 먹어서인지, 노안 탓인지 종이의 글자들이 3D로 다가오는 터라 책을 읽으려면 안경을 벗어야 하는 불편함 때문이다. 일상생활용 안경과 컴퓨터를 보는 안경이 따로 있지만 책을 볼 때는 두 안경 중 어느 것도 맞지 않기 때문에 잠시 안경을 벗어야 하는 불편함,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는 불편함, 활자들이 위 아래로 움직이는 느낌 때문에 조금 어지럽다는 불편함... , 아니다. 사실 이건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단지 종이보다는 스크린이 더 익숙해져버렸다 라는 것이 정확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카프카를 읽다 문득 코끝이 간질간질, 그리고 커다란 재채기.

   순간 나는 쓰게 웃고 말았다.